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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로 살아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

다음세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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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 의심도 믿음입니다.

07-31

요한복음 4장 47절에서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직접 찾아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가기 위해서였죠.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들의 임종을 지켜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왕의 신하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꼭 살려야겠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왕의 신하를 따라나서지 않았고, 오히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요 4:50)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왕의 신하는 믿었을까요? 여기서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게 자신을 따라서 아들이 누워있는 집에 갈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요청을 거절한 거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할 수도 있는 긴급한 상황에서 자기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실망을 마음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인들을 만나는데, 하인들은 “당신의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을 듣고, “할렐루야! 역시 예수님이 치유해주셨구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제” 나았냐며, 그 시간에 대해 캐묻습니다. “몇월, 몇일, 몇시, 몇초에 나았는데?”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계산 후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신 때와 아들이 진짜 치유된 시간이 일치된 것을 보고 진짜로 믿습니다. 

(제 생각에 왕의 신하 MBTI는 F가 아니라 T였을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 두 장면을 모두 왕의 신하가 “믿었다”라고 기록합니다. 

분명히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왜 요한은 똑같이 “믿었다”라고 기록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심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고, 의심했던 것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긴가 민가’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죽음과 부활 등을 의심할 때가 있죠.

그러나 축하드립니다. 그것 또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과 실망 모두 믿음으로 보십니다.


믿음은 내가 얼마나 확신하고 의심없이 믿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에 있어서 믿음의 대상이 확실한지, 정말 신뢰할 수 있을지의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한강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을 내가 100% 확신하다고 한들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사용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이끄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곧,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 또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또 다른 믿음의 도약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무너졌던 것들이 회복되고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도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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