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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다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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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들

11-10

잃어버린 아들 (눅 15:11-32)


잃어버린 아들1 

흥청망청 쾌락을 따라 사는 작은 아들은 빨리 아버지 품을 떠나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유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 돈으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다. 작은 아들의 내면에는 ‘자기 중심성’이 가득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좇았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탕하게 살아갔다.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살았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면서 고개를 떨군다.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해진 아들은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께 두 손 들고 돌아온다. 그제야 아버지 품이 가장 따뜻함을 깨닫게 된다.  


잃어버린 아들2

아버지에게는 잃어버린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큰 아들은 도덕적으로 살았다. 집안의 규칙을 늘 잘 지켰다. 하지만, 자신처럼 윤리적으로 살지 않는 동생을 무시하고 미워했다. 그는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큰 아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 역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도 아버지의 유산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동생이 다시 돌아와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했으니, 자기 몫의 유산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 예상했다. 살진 송아지도 사실 자신의 것인데 왜 그걸 동생에게 주냐고 따진다. 큰 아들도 작은 아들처럼 ‘자기 중심성’이 가득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나마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왔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 마음과 더 멀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상징한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한다. 두 부류는 전혀 다른 것 같다. 하지만, 똑같다. 둘 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유산에 관심이 더 많다. 유산을 획득하고자 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형이 좀 더 그럴 듯하게 잘 포장했을 뿐이다. 둘 다 자기 중심성이 가득했다. 동생은 거친 탐욕으로, 형은 세련된 탐욕으로. 교회 밖에는 동생이 있고, 교회 안에는 형이 있다. 


잃어버린 아들3

오늘 이야기 속에 잃어버린 아들이 더 있다. 바로 탕자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수많은 잃어버린 작은 아들과 잃어버린 큰 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잃어버린 아들이 되셨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 품을 떠나셨다. 높고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잃어버린 바 되셨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이유는 예수님이 아들의 지위를 포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잃어버린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는 교회. 잃어버린 작은 아들을 권유해서 돌아오게 만드는 교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여 동생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큰 아들이 많은 교회. 우리 창일교회가 그런 교회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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